성주이씨 세거지

그동안 산청의 인규님과 창원의 지화님 그리고 포천의 상복님 등 최근에 우리 대종회 홈페이지를 의미있고 들어오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 주시는 많은 분들의 정성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보답을 하려고 했으나 제가 본래 게으르고 또 공부를 한 것이 얼마되지 않아 아는 것이 적어 올릴만한 자료가 없어 죄송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지난번 포천의 상복님께서 말씀하신 성주이씨 세거지에 대한 자료를 지금까지 찾은 조그만 내용만 일부 올립니다. 몇번에 걸치는 것이지만 사실 그동안 다 알고 있던 것을 정리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될 것이고 이 글을 보시면서 잘못 된 점이나 올려지지 않은 많은 각 지역의 입향조와 주요 세거지를 같이 올려서 모든 우리 종문이 다 보고 어디에 어떠한 문중이 살고 있는지 알고 혹시나 그곳을 방문하게 되면 찾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한번 그동안 이 공간을 빛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1. 성주이씨의 인구분포(1985년 인구조사)

전체인구는 153,146명으로 경남에 18,375명, 경북에 18,081명, 경기에 12,879명, 서울에 29,027명, 대구에 23,533명, 부산에 17,773명이 살고 있고 그 외 지역엔 10,000명이되지 않는다

2. 주요 세거지

1) 밀직공파(密直公派) : 장경(長庚)의 장남 백년(百年)의 후계(後繼)로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 봉계리(鳳溪里)와 자산리(紫山里), 가천면(伽泉面) 화죽리(花竹里), 수륜면(修倫面) 신파(新坡)·오인(五印)·포월리(浦月里), 용암면(龍巖面) 선송리(仙松里) 등 주로 관향에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살고 있고 9세손 세영(世榮)의 후계가 전남 곡성(谷城)의 옥과(玉果)로 옮겨갔던 것 같고, 역시 9세손 석견(碩堅)의 후계가 성주(星州)에서 경북 영천(永川)의 와촌(瓦村)으로 이거 했던 것을 비롯하여 고령(高靈)·금릉(金陵)·칠곡(漆谷)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참지공파(參知公派) : 차남(次男) 천년(千年)의 후계로 손자 승경(承慶, 요양성참지정사)이 원(元)나라에서 벼슬하였으므로 요녕성(遼寧省), 평북, 함흥 등지에 세거 하였고 6세손 종실(從實)이 정평 부사(定平府使)로 좌천되었던 사실과 8세손 기(琦)가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던 사실이 `을묘보(乙卯譜)'에 보이고 이 무렵부터 정평(定平)·함흥(咸興) 등지가 세천지(世阡地)로 지켜졌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 세거 하였다고 믿어진다. 또 10세손(世孫) 천충(天忠)이 경남 남해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3) 시중공파(侍中公派) : 삼남(三男) 만년(萬年)의 후계로 초전면(草田面) 검단(黔丹)에 집성촌이 있으며 5세손 사분(思芬) 이래로 충주(忠州)·중원(中原) 등 충북 일원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며 6세손(世孫) 지활(智活)은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으며 함양에 송호서원과 거창에 망월정이 있고 자손들이 거창(居昌)·함양(咸陽) 등지에 나뉘어 거주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4) 유수공파(留守公派) : 사남(四男) 억년(億年)은 개성유수직(開城留守職)에서 나라가 어지어움을 한탄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경남(慶南) 산청(山淸)으로 이주하였다.

5) 문열공파(文烈公派) : 오남(五男) 조년(兆年)의 후계로 성주읍(星州邑) 예산리(禮山里)에 집성촌이 있으며 고려와 조선초에 벼슬함이 많아 전국각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고 특히 5세손(世孫) 직(稷)이 태(太)·정(定)·태(太)·세(世) 4대(代)에 걸쳐 정승(政丞)의 자리에 있었으며 서울, 경기 일원에 집성촌이 많다. 5세손 용(容)이 태조조에 정도전(鄭道傳)의 미움을 사 평북 영변(寧邊)의 오리(梧里)로 유배되었던 것 같고 아들인 익번(益蕃)의 대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손 사형(師衡)의 자손들이 강원도 고성(高城)에 속해 있는 간성(杆城)에 자리잡았던 것 같고 7세손의 대에 와서 순년(舜年)의 자손들이 밀양(密陽)에 맹창(孟昌)의 자손들이 평남 성천군(成川郡)에 각각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세손 숙순(叔淳) 8세손 흥로(興老) 이래로 그 후손들이 충북 옥천(沃川)과 경남 산청(山淸)·남해(南海)에서 세거해 온 것 같다. 이들 지역에 여러 대를 거쳐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묘롱(墓壟)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성주는 우리의 관향으로 각 파별로 많이 세거하고 있으나 특히 밀직공파의 후손들이 아직도 많이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

3. 경북 성주(1)

1) 경북 성주군 금수면 어은리

금수면 소재지에서 성주댐 방향의 국도로 가까운 거리의 동편에 있는 언내마을과 그 동편 고개너머 적산마을과 언내 서북 국도의 고갯마루에 있는 웃후리실 마을로 분포된 외진 마을이다. 적산마을 남쪽 고루산(260m)에는 할미산성의 전초망루가 있었고 이 누각에는 북을 달아 산성과 요소에 북을 울려 교신했다고 한다. 고루(북다락)가 있어서 고루산이 되고 고루재를 고름재라고 한다. 적산마을은 금수면에서 벽진쪽의 국도 안쪽의 關門 마을이다. 고려 말 성주인 李仁敏의 아들인 李稷(1362-1432)이 만년에 세거하던 고택이 있었는데 뒤에 名僧 학조가 이 집을 얻어 積山寺라고 했다 한다. 그후 200년 뒤 임진왜란 때 이 절에 있던 중 贊熙가 왜병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해서 절을 폐하였다고 한다. 언내마을에는 金寧人 金錫壁의 후손과, 인조 때의 인물인 李守根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김녕김씨 22호, 의성김씨 9호, 평산신씨 9호, 경산이씨 6호, 성주이씨 5호, 고성이씨 5호, 그 밖에 39호이다.

(웃후리실·상후동)

조선 인조 때 李守根이라는 유생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부락에 들어가 점심 대접을 받고 난 후부터 인심이 후하다고 소문이 나서 동네 이름을 후리실이라 불리게 되었고 상위치에 있다 하여 상후리이라고 한다.

(언내·엇내·어은)

약 300여년전에 김씨 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는데 당시에는 금물방 또는 어천곡이라 하였고 약 280여년전 김중익이라는 訓練部正이 어천곡에 고기가 많이 숨어 살고 있다고 하여 어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적산)

약 600년전에 조선 영상인 星州人 李稷이 入鄕하였다. 산이 첩첩이 쌓여 적산이라고 하며 이직의 고택을 개축하여 명승 학조가 기거하면서 적산사를 세웠다고 하며 200년전 京山人 屛巖 李秉璜이 岩浦에 서 移居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다.

(후리실·후리)

인심이 후하다고 하여 후리실이라고 하였으며 상후·하후·중후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은 국도변에 위치하여 주곡을 주로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 영의정 문경공 형제선생 휘 직(稷)

. 고려 대제학 정당문학 문열공 매운당 휘 조년(兆年)의 자 대제학 성산부원군 모은공 휘 인민(仁敏)의 장자

.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 성주 송곡(현 고령 다산)에서 출생

. 고려 우왕 3년(1377년) 16세로 문과급제 경순부주부, 밀직사우부대언, 예문제학, 지신사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밀직사제학, 신도궁궐도감, 중추원학사, 대사헌(현 대법원장) 중추원사,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참찬문하부사, 삼사좌사, 지의정부사, 예문관대제학, 사평부사, 이조판서, 영흥부윤겸 동북면 도순문찰리사, 의정부 찬성사, 판의용순금사사 천능도감제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셨다.

. 조선 개국3등공신, 좌명공신(2차 왕자의 난때 태조를 도움)

. 주자소를 설치하여 구리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 烏鷺詩(오로시)로도 유명한 문장가이다.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 세종 13년(1431년) 8월 7일 卒(향년 70세)

. 配(배): 封馬韓國大夫人(봉마한국대부인) 陽川(양천) 許氏(허씨)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선유리 서산

(원래는 여주 북성산 뒤에 모셨으나 영릉 -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능 - 으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 묘재: 근척재

2) 경북 성주 벽진 봉계리

碧珍面의 남부로 伊川을 동쪽에 두고 大家面과 인접하여 솟질, 발간이, 집실, 종자골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明間坊에 속해 坊의 중심지였던 이곳 솟질마을은 高麗初 星州人 李堅守가 世居했고, 연산조 때 昌原人 兪良弼이 金陵에서 입향하였다. 조선초 學圃 兪益明은 慶尙右道 都節制使와 明나라 正朝使로 활약했고, 그의 壇碑가 있으며 四美亭 兪遠을 향사하는 亭舍가 있다. 발간이 마을에는 1630년경 李惟亨이 入居했다. 집실마을에는 高麗 때 참지문하사 南陽人 洪彦脩가 입향 世居했고, 조선시대 해평군 김수의 아들 金寬尙과 참의 趙元壽가 입향했다. 姓氏별 분포는 仁同張氏 70호, 星州李氏 55호, 昌原兪氏 35호, 光山卓氏 13호, 他姓 56호이다.

□ 성주이공 휘 유형(惟亨)

도은공 휘 숭인(崇仁)의 제5자 전직판결사 휘 차삼(次參)의 5대손으로 사평 춘양(春陽)의 제3자이다. 묘는 발간이마을 뒷산에 있으며 배는 밀양박씨이다.

3) 경북 성주 수륜 신파리

修倫面의 면소재지가 위치한 지역으로서 면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서쪽으로 트인 교통은 주민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가야산의 구릉에 위치한 조양리, 중리, 천방마을이 있다. 원래의 신당마을에 修倫洞 德村마을 동편의 만지마을에 위치한 面廳舍가 1936년의 홍수로 인해 폐몰되자 만지마을(市場)이 이설해서 도로변을 만지로로 이른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이래 所件坊에 속했다. 1845년 靑坡坊이 되었던 이곳에는 고려말의 星州人 陶隱 李崇仁(1349∼1392)이 世居하였다. 이곳에는 판돌걸(지석묘의 넓직한 돌이 있는 거리), 톳재비들(옛날 土亭이 있었다는 천방리 마을 앞 들), 삐끔징이(옛날 패구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들), 밤징이(옛날 밤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들), 蔓旨장터(수륜시장터), 수리개울(신당마을 옆의 細川) 등이 전해지고 있다.

□ 대제학 문충공 도은선생 휘 숭인(崇仁)

. 고려 충목왕 3년(1347년)에 성주 용산리에서 출생

. 공민왕 11년(1362년)에 문과에 급제

. 肅雍府(숙옹부) 丞旨(승지), 太學(태학) 敎官(교관), 科場試官(과장시관), 長興府使(장흥부사) 兼(겸) 進德博士(진덕박사), 世子師(세자사), 典理摠郞(전리총랑) 兼(겸) 寶文閣直提學(보문각직제학), 成均司成(성균사성) 司議大夫(사의대부), 藝文館提學(예문관제학),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

. 태종 원년에 贈(증) 資憲大夫(자헌대부) 吏曹判書(이조판서) 文忠公(문충공)

. 태조 5년(1396년)에 정도전의 심복 송흥종과 황거정에게 피살됨.

. 配(배): 貞夫人(정부인) 南陽洪氏(남양홍씨) - 묘소는 충남 은진 장화산

. 묘소: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동

. 묘재: 遠慕齋(원모재), 晴暉堂(청휘당)

. 공의 신위를 모신 서원 및 사당

경북 성주 延鳳書院(연봉서원)

경북 성주 忠賢祠(충현사)

전남 고흥 흥양 星山祠(성산사)

경북 금릉 지례 報本祠(보본사)

충남 보령 감포 士昌祠(사창사)

황해 개성 杜門洞書院(두문동서원)

4. 경북 성주(2)

1)경북 성주 벽진 자산리

星州의 주산 伽倻山(1,430m)의 支脈이 厭俗山(870m)과 斐旨山(784m)을 거쳐 星山(715m)에서 邑基를 향해 남으로 내리며 草田과 碧珍을 面界를 하여 紫山(360m)으로 솟아 그 서편에 山谷을 차지하여 웃점복, 아래점복, 산느마, 기렁골, 중리, 안산의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고대의 풀골(粥谷)방, 雲谷坊에 속했고, 웃점복 마을은 동편에 있는 紫山산골에 있어 紫山마을이라고도 한다. 자산은 신라말 儒聖이며, 文豪인 文昌候 崔致遠이 黔丹禪師와 함께 道仙의 뜻을 같이하여 山上에서 學問을 토론하고 老年을 消日한 명산이다. 이 마을에는 선조 때 東萊人 溪隱 鄭世老가 井邑에서 입향하여 후손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으며, 기령골(靈洞)마을에는 星州人 李長庚의 후손이며 陶隱 李崇仁의 후손이 산다. 그리고 중리마을에는 宣祖 때 金海人 許億이 忠州에서 입향하여 후손이 산다. 東萊鄭氏 38호, 星州李氏 40호, 金海許氏 19호, 淸州韓氏 10호, 그밖에 他姓이 13호이다.

(귀령골·貴靈谷·靈洞)

1500년경 李舜이라는 사람이 이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古靈牧使 李守一이 피란와서 살게 되었으므로 귀령곡이라 부르다가 그후 다시 靈洞이라 불렀다.

(산느말·사르말·山田)

1600년경 李舜의 후손이 산아래 밭에 이주하여 살았다고 산느말, 또는 山田이라 했다. 현재 14가구가 살고 있다.

□ 수직통정대부 부호군 휘 순(舜)

대사헌 문충공 도은선생 휘 숭인(崇仁)의 제5자 전직판결사 휘 차삼(次參)의 7세손으로 참봉 세근(世根)의 증손이다. 생부는 수직통정대부 학성(鶴星)으로 문경공 일재선생 항(恒)의 손자이다. 자는 화약(華若) 호는 노암(老岩)으로 인조 신사 7월 8일에 생하여 임인년 10월 15일에 졸하니 향년이 92세였다.

2) 경북 성주 수륜 보월리

(탑안·탑동)

이 마을에는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높이 5.1m의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119호)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이광국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 이름을 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탑안, 혹은 탑동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星州의 土姓인 星州人 李崇仁의 후손들이 世傳하는데, 현재 8 가구가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고있다.

(월촌)

국도 33호선에서 동북쪽으로 약 8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1875년경에 작천의 星州 李氏가 入鄕하였다. 마을 뒷산이 동쪽에 떠오른 달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月山의 月字를 따서 月村이라고 하였다. 현재 24 가구 68 명이 거주하며 이중 성주이씨가 13 가구, 그 외 여러 성씨들로 분포되어 있다.

3) 경북 성주 수륜 적송리(오인)

고려말에 藝文館提學을 지낸 문충공 陶隱 李崇仁의 다섯 아들 李次若·李次參 등이 이 마을을 이루고 효성과 우의를 다졌다. 이곳 뒷산에 五印齋를 건립하고 다섯 형제가 五印岩에서 놀았다고 한다. 五印岩은 현재 마을의 洞祭터이다. 이 오인암과 오인재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이름을 五印洞이라고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도은 이숭인의 다섯 아들이 동방급제하여 부친을 찾아 뵙던 날 바위에다가 다섯 이름을 새겼던 까닭에 이곳을 오인암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인재는 차약의 증손 세영(世榮)이 임진란을 피하여 옥과로 옮기게 되어 재실로 쓰이다가 후손 봉훈(鳳勳)이 오인동으로 들어온 후 종갓집이 되었다.

□ 군수공 휘 차약(次若)

밀직사사 정절공 휘 백년(百年)의 현손으로 대제학 문충공 도은선생 휘 숭인(崇仁)의 장자이다. 공민왕 21년(1363)에 오인동에서 태어나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교훈을 높이 받들어 그 행동 하나하나가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 문과에 급제한 뒤에는 함양군수(咸陽郡守) 대구군수(大邱郡守)를 역임하였다.

5. 경북 성주(3)

1) 경북 성주 수륜면 남은리

조선 成宗 때 조성된 마을로서 星州李氏 二樂堂 李重亨의 후손이 살고 있고, 또 밀양인 朴文彬의 후손 朴在榮의 세거지이고, 永川崔氏 竹軒 崔恒慶의 후손 月洲公의 후예들이 이거하여 三姓이 균형을 이루어 살고 있다. 마을 앞에 개천이 흐르고 옆산의 모양이 까치가 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鵲川이라고 하였다. 또 시내가 흐르고 가락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가락내·작천이라고도 불렀다.

□ 성균생원 이락당 휘 중형(重亨)

대사헌 문충공 도은선생 휘 숭인(崇仁)의 8세손으로 예빈시주부 휘 선계(善繼)의 아들로 자는 회초(會初) 호는 이락당(二樂堂)이다. 선조 을미 10월 17일 생 하여 인조 갑자 중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생원이 되었으며 한강 정구선생의 문하에서 독실히 학문에 힘써 하나의 연원을 이어 받았다. 묘소는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능곡 농서군공 휘 장경(長庚)묘소 계하에 있다.

2) 경북 성주 월항 유월리

성주군과 칠곡군의 경계이며 33번 국도의 고갯마루를 달암티(표고 130m)라하고, 그 나쪽의 산봉을 달암산(月岩山:304m)이라 하며 이산에 달바위가 있고 달암산 서쪽 산아래에 國道와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선조때 대구에서 慶州인 月 崔天綱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고 海州吳氏와 星州人 李龜의 후손이 살고 있다. 개척 당시 마을 뒤산에 달 모양의 바위가 많다 하여 月岩이라 하였다고도 하며 이 바위 위로 달이 떠오른다 하여 달이 뜨는 바위라는 뜻으로 달암(月岩)이라 했다고도 한다.

3) 경북 성주 초전 자양리

星山(별미)에서 동남으로 뻗은 산맥이 초전과 벽진의 면계를 이루면서 그 중간에 紫山이 솟아 있는데 북쪽의 높은 봉을 큰 자산, 남쪽의 조금 낮은 산을 작은 자산이라 한다. 두 봉우리를 중간으로 해서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星州李氏 집성촌 4개 마을을 今丹이라 하며 작은 자산 끝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잡은 마을이 義城金氏 집성촌으로 黔丹(일명 內洞)이며 큰 자산을 서편에 두고 터를 잡은 새박골 밑으로 모퉁이를 돌아 新豊이 동남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최신에 현대식 건물 5동이 신풍 입구에 세워지면서 새마을을 이룬 것까지 8개 자연부락을 합쳐 자양리라고 부른다. 초전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黔丹은 신라말기에 마을을 이루었으며 黔丹寺 아래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검단리로 불리어져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전면 자양동이 되었고 1952년 행정동인 자양 1, 2동으로 분동 되었다. 1989년 5월 조례 1076호로 동이 리로 개정되면서 현재의 자양리가 되었다. 통칭 黔丹里는 신라말기에 생긴 마을로써 성주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산 자락을 깔고 자리잡고 있으며 자산은 성주의 정기가 서린 靈山으로 星山, 月山, 鳳陽山, 梅績山과 함께 성주문화의 뿌리로 빛나는 고대 碧珍伽倻의 城邑國 형성에 필수 요건이었다. 지리 풍수상으로 작은 자산 정상에는 천하 명당이 있어, 지금도 사람이 밟으면 웅장한 소리가 날뿐 아니라 이곳에 묘를 쓰면 성주가 망한다고 하여 아무도 무덤을 쓸 수가 없는 곳이다. 최근까지도 가뭄이 극심할 때면 성주군 유지들이 生亥을 가지고 올라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어찌나 영험했던지 제관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비가 와서 옷을 흠뻑 적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말기 작은 자산 중턱에는 검단사란 절이 있었고 검단사가 있었던 곳을 부처돌 꼭대기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절터의 흔적으로 돌축대가 남아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검단사에는 빈대가 하도 많아 절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자산은 옛부터 지리 풍수가들이 빼어난 산세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명산으로 지금도 최치원선생이 약을 찧었다는 돌호박이 정상을 비켜 남아있고 큰 자산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가마바위가 옛날처럼 그대로 서있다. 세시풍속으로 정월 대보름이면 청춘 남녀들이 큰 자산 작은 자산 두 정상에서 달집을 태우며 꽹과리와 춤으로 풍년을 기원하며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윗 금 단)

星州李氏 집성촌으로 금단 4개 마을 중 맨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금단이라 부른다. 지금은 번창했던 옛날의 빈집터가 더 많은 마을이다.

(중 촌)

상하 금단 중간에 있다하여 중촌이라 부른다.

(아랫금단)

윗금단 아래에 있다하여 아랫금단이라 하며 성주이씨 집성촌이다.

(선틀배기)

금단 끝에 있는 마을로써 성주이씨, 고성이씨, 현풍곽씨, 의성김씨 등이 새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새벽골)

자산을 서편에 두고 신풍을 동쪽에 가까이 한 산촌이다. 1620년경 송응준이 새벽에 마을 이름을 지었다하여 효동 또는 새벽골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새벽 하늘의 자연을 비유해서 조용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동이라 했다고 한다. 성주이씨 집성마을로 약 20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