陶隱 李崇仁 關聯資料

· 도은 이숭인 문학연구 - 아성찬, 공주대 교육대학원 1999(석사)

· 태고국사 법어집(서문·발문)

· 도은 이숭인 연구 - 이남복, 동의논총 24집 1996

· 동학사 삼은각(삼은비문)·숙모전

· 인흥서원·인흥사·용천사

· 둔촌선생유고·둔촌선생유고서문

· 신증동국여지승람(영일읍역기문)

· 이숭인의 정치활동에 대한 일고찰 - 강지, 전주사학 제4집 49-82 쪽

, 1996. 11 전주대 부 설 전주사학연구소

· 고려사 열전·실록·행장

· 이숭인 연구 - 전수연, 이화여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14쪽

· 도은 문학고 - 이병혁, 한국한문학논총 1집, 한국한문학회 1979

· 여말 한문학의 주자학적 경향에 대하여: 도은 이숭인을 중심으로 - 이병혁

, 석당논총 10 집, 동아대 1985

· 도은 이숭인론: 그의 시 세계를 중심으로 - 박성규, 동양학 21집

,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1

· 도은 이숭인 시문학연구 - 박종욱, 한국한문학연구 11집, 동국대한문학연구소 1988

· 삼은과 여말 한문학 - 박천규, 동양학 9집, 단국대동양학연구소, 1979

· 도은의 시와 은일성 - 조재익 - 한국학논총 9집, 단국대 한문학회 1988

· 이숭인의 생애와 문학 - 박찬금,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1.

· 도은연구 - 유준근,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논문집 제8호, 동양어문학회 1982

· 고려시대 한시의 시풍연구 - 변종현, 한국학논집 8집, 단국한문학회 1990

· 도은 시문학연구 - 김정희, 복현한문학 2집, 복현한문학회 1983

· 고려시대의 한시연구 - 민병수,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84

· 도은선생문집(국역) - 경상북도(편) 1981

· 조선왕조실록 권 1 '이숭인약전'

· 도은 이숭인 - 김일환, '한국인물유학사, 한길사 1996

· 고려말 성리학 수용기의 한시연구 - 이병혁, 태학사 1987

· 예명현집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3

· 삼현기년 - 성주이씨대종회, 회상사 1984

· 도은문집 -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73

· 동문선 - '도은재기'

· 목은집 권8 - '율정선생일고서'

· 고려후기 '전'의 전개와 사대부의식 - 박혜숙, 한국통사 권2

, 조동일 지식과산업사 1983

· '한국고전인물연구' - 박희병, 관악어문학회 11집

· 한국한문학에 있어 전과 소설의 관계양상 - 박희병, 한국한문학연구

· '동인시화' - 서거정

· '조선한문학사' - 김태준, 시인사 1997

· '문학연구의 방법' - 이상섭, 탐구당 1984

· '고려시대사' - 박용운, 일지사 1987

· '대한국사' (3) - 이선근, 대한출판공사, 1984

· '한국문학사상사시론' - 조동일, 지식과산업사 1978

· '한국한문학사' - 이가원, 보성출판사 1986

· '조선문학사' - 이명선, 범우문고 1990

· '한국 한문학 연구의 기초' - 정용수, 동아대학교 석당전통문화연구원 1993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한국사연구회, 청년사 1996

· '한국고전인물연구' - 박희병, 한길사 1992

· '역대인물한국사' (8) - 한국출판연구소, 신화출판사 1979

· '한국 문학사의 시각' - 임영택, 창작과비평사, 1982

· '한국 한시의 이해' - 이병주, 민음사 1987

· '고려말 성리학 수용기의 한시연구' - 이병혁, 태학사 1987

· '고려조 한문학연구' - 서수생, 형설출판사 1972

· '역대 한국인물사' - 한국출판연구소, 신화출판사 1979

어느 가을밤의 슬픔

작자: 이숭인(李崇仁/1349-1392)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칠흑같이 캄캄한 어느 가을밤이었다. 시름에 겨워 문득 졸고 있었는데, 내 혼백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라 이윽고 옥황상제의 궁궐에 이르렀다. 사방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으므로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가 어전(御前)에 앉으니 옥황상제님의 낯빛이 그지없이 부드러웠다.

하계에 사는 미천한 신하가 마음에 맺힌 한을 풀 길이 없어 이렇게 엎드렸나이다. 제가 겨우 강보를 면하면서부터 반드시 옛 사람을 본받아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인(仁)을 이루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을 따랐고, [뜻 있는 선비는 시궁창에 있음을 항상 잊지 않는다]고 맹자가 되새긴 공자의 말씀을 또한 힘을 다해 지켜 왔습니다.

임금님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만이 전부였고, 그 밖의 딴 생각이 있지 않았사온데 학문을 그르치고 시속에 아첨하는 잡스러운 무리들이 저를 도마 위의 고기같이 난도질을 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아첨하고 중상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의 극성은 급기야 제 스스로를 망치게 할 것인즉, 제 무슨 유감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그 뜻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아 초연하게 높이 올라 멀리 내려다보며 오직 황은(皇恩)과 인덕(仁德)을 되새기며 처박혀 있을 뿐이 온데 이 길 그르다고 하시면 다시 또 어디로 가야 하오리까.

지극히 현명하신 옥황상제님 원컨대, 침몰된 땅에서 이 몸을 건져 주옵소서.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로 가슴이 메이도록 조아리니 가엾이 여기신 옥황상제님께서 말씀하셨다.

오호라 그대는 내 말을 좋이 듣거라. 학문하는 길이 유독 귀하다고 함은 세상 추세에 따라 변통할 줄 알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해가 중천에 뜨면 반드시 서쪽으로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하늘의 도리 또한 늘 같지 않은 것인즉, 인간들이 꾀하는 일에 어찌 곡절이 없으랴. 세상 사람들이 모난 것을 싫어하는데, 그대는 어찌 매사에 원만하지 못하며, 세상이 온통 시속으로 치닫고 있는데, 그대 어찌 홀로 고고하려 하는가. 그대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이 또한 그대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위험에 들지 않고 일신을 편하게 하려거든 그 고집을 버리고 세상 추이에 따라 사는 게 어떨꼬.

아무 말 없이 물러 나와 골똘히 생각하니, 옥황상제님의 하해 같으신 은혜 망극하기 그지없으되, 그러나 내 뜻한 바 곧은 마음을 지금에 와서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비록 나의 여생이 곤궁하게 된다 해도 기필코 나의 뜻을 굽히지는 않을 터, 천년 전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이후의 무궁한 세월의 사람들이 또한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내 오직 옛 성현들의 덕을 우러러 글이나 지어 스스로를 위로코자 한다.

안화사

작자: 도은 이숭인

嶺山巖 細泉榮

知自松根結處生

紗帽籠頭淸晝永

好從石 聽風聲

송악산 바위틈에 가늘게 흐르는 샘물

알겠구나. 소나무 뿌리 엉긴 곳에서 솟아남을

사모를 눌러 쓰고 앉은 한낮이 길 것 같으면

돌 솥의 솔바람 소리 즐겨 들어 보세나

고려말의 문장가이면서 성리학자인 도은 李崇仁(이숭인)은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과 같다'고 하면서 차를 애호하였던 인물이다. 그가 삼봉 정도전에게 차 한 봉지와 안화사 샘물 한 병을 보내면서 지은 시가 위의 글이다..

안화사는 개경 송악산 자하동에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샘물은 <고려도경>에 기록 될 정도로 유명하다. 안화사는 송나라 황제 휘종의 친필 편액이 있는 곳이며 단청과 구조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문을 나서면 붉은 언덕, 푸른 뫼뿌리가 가로 세로로 펼쳐져 있으며, 시내가 돌길을 따라 흐르는데 물소리가 마치 옥 소리 같으며, 사면은 소나무 잣나무만이 하늘에 닿아 있어 그 사이를 왕래하는 사람들은 마치 병풍의 그림 가운데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풍광 좋은 곳에서 나오는 샘물을 보낸 것은 더욱 맛 좋은 차를 끓이기 위함이다. 艸衣가 <茶神傳>에 '차는 물의 정신이고 물은 차의 본체다. 참된 물이 아니면 그 정신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品泉에 깊은 관심을 가졌듯이 좋은 차의 기본은 좋은 물을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차 달이기에 알맞은 물을 보내는 풍습이 예로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당의 장우신(張又新)은 <煎茶水記>에서 '본시 차란 산지에서 달이면 좋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럴 것이 물과 흙이 차와 어울리기 때문인데, 그곳을 떠나면 물의 공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한 바 있는데 도은이 어찌 이것을 모르고 보냈겠는가? 하여튼 차 한 봉지와 샘물을 보내니 지루한 날에 끓여 드시라는 내용이니, 삼봉이 이 선물을 받고 진한 감동을 받았음은 짐작하고도 남겠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 '돌솥의 솔바람 소리'도 재미있다. 차를 즐기는 이들은 찻솥에서 끓는 물소리를 특히나 즐겨했다. 고려 때 김극기는 '구리병에 와르르 소나기 오는 소리'로, 李衍宗(이연종)은 '차 솥에서 불어오는 솨솨 솔바람 소리, 그 소리만 들어도 마음 맑아지네'라 하였고, 이규보는 '처음에는 마치 목멘 소리 같더니 점점 생황 소리 길게 나네'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 '지렁이 소리, 파리소리, 봄 강물의 음향, 급히 구르는 수레바퀴,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 등 그 표현이 다양하다

작자: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타는 불에 맑은 물 끓이노니

푸른 찻잔에 뜨는 향기가 더러운 창자 씻어준다

마루턱에 찬 백만 창생 운명

봉래산 신선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인 흥 서 원

(위치 :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소재)

비슬산의 북쪽 평지에 위치한 이 절터는 모두 남평문씨 세거지의 동리와 밭으로 변하고 말았다. 창건 연대와 개산조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13세기에 벌써 창건 된지 오래 되어 절이 퇴락 되었고 이때의 절 이름은 인흥사였다.

13세기에 보각국존 일연이 이 절에 주지로 계신지 11년 후 폐사가 된 듯하다. 왕년의 인흥사에서 간행된 불설장수멸죄다라니경과 대비심다라니계청이란 불경이 전하고 있다.

전자는 간기에 1287년(충렬왕 4년 지원 15년) 인흥사 개판이라 적혀있고 후자에는 간기에 1293년(충렬왕 19년 지원 30년) 계사 정월일 인흥사 개판이라 적혀 있다. 그 후 일연선사가 중창하여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절터도 넓혀 대가람을 이룩했다.

이에 조정에 주청하여 인흥사라 이름을 바꾸고 충렬왕의 어필로 현판 글씨를 써 받았다. 또 공민왕이 쓴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금으로 쓴 고려 여러 임금의 글씨 현판이 고려말까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성주출신의 대유학자요 문호이던 도은 이숭인이 공부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 이 절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폐허가 된 뒤 유지에 서있는 삼층석탑 2기 중 1기는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건 하고 1기는 파탑이 되어 관리하고 있다.

僧房(스님의 거처)

작자: 도은 이숭인

山北山南細路分 산북산남세로분

松花含雨落빈紛 송화함우락빈분

道人汲井歸茅舍 도인급정귀모사

一帶靑烟染白雲 일대청연염백운

산북산남으로 오솔길은 갈라져 있고

송홧가루는 비에 젖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중은 물을 길어 띠 집에 돌아가는데,

한줄기 푸른 연기는 흰 구름을 물들인다.

(기구) 山 北 山 南 細 路 分 에

산의 북쪽 남쪽으로 오솔길이 나뉘고,

산 속에 조그맣게 나있는 오솔길(細路)을 작가가 걸으며 주변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승구) 松 花 含 雨 落 紛 紛 이로다.

빗방울을 머금은 송화가루 어지러이 떨어지네.

좀 더 세세한 부분을 그리고 있다. 노란 송화가루가 아침 이슬을 머금어 봄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정경을 그려낸다. 기구는 山이라는 거대한 자연을, 승구는 산 속 오솔길 주변의 섬세한 정경을 묘사하여 거시적인 세계에서 미시적인 세계로 시상을 확대하고 있다.

(전구) 道 人 汲 井 歸 茅 舍 하니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집으로 돌아가니

앞 구들은 자연에 대한 묘사를 하고 전환에서는 인간적인 요소로 도인(道人)과 모사(茅舍)가 등장한다. 밥을 짓기 위해 물을 긷는다는 표현은 도닦는 스님의 초월적이고 신비스러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시어가 아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산 속에 은거한 목탁 두드리는 스님의 모습이 아니다. 자연 속에 묻힌 인간의 여유작작하는 태도가 그려지고 있다.

(결구) 一 帶 靑 煙 染 白 雲 이로다.

한줄기 푸른 연기가 흰 구름을 물들이네.

푸른 연기가 띠를 형성하여 하늘의 흰 구름에 닿았다는 표현은 현란한 색채의 묘사는 아니지만 동양화 특유의 여백의 공간에 파스텔 톤의 은은하고 간결한 풍경그림을 보여준다. 게다가 전구의 인간적 요소조차 자연속에 파묻히고 만다.

(요점 정리)

연대 : 고려 말

형식 : 칠언절구

제재 : 승사

시간적 배경 : 봄

운자 : 분, 분, 운

주제 : 산사의 한가로운 정경

출전 : 도은집

(내용 연구)

송화 : 송홧가루

빈분 : 어지러이 흩어지는 모양

모사 : 띠로 엮은 집. 여기서는 절을 말함

염백운 :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구름을 뒤덮는구나.

(이해와 감상)

산 속의 승사, 곧 절을 소재로 하여 지은 서경시로 산사의 한가로운 모습을 스케치하듯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로 송홧가루 어지러이 흩날리는 산사의 저녁을 읊은 것이다. 이 시의 이면에는 자연에 은거하고 싶은 작자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심화 자료)

작자: 이숭인

고려 말기의 학자로 본관 성주(星州). 자 자안(子安). 호 도은(陶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곧 장흥고사(長興庫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명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으며, 우왕 때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하다가 한때 유배, 그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전임하였으나 친명(親明)·친원(親元) 양쪽의 모함을 받으며 여러 옥사(獄事)를 겪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할 때 정도전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黃巨正)에게 살해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들도 탄복하였다. 저서에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白廉使 惠茶

작자: 도은 이숭인

先生分我火前春 色味和香一一新

篠盡天涯流落恨 須知佳茗似佳人

活火淸泉手自煎 香浮碧椀洗훈전

嶺崖百萬蒼生命 疑問蓬山刻位仙

선생이 나에게 주신 한식 전의 봄 차는

색과 맛 향 그런 향기 모두 새롭네

온 세상을 떠도는 한 깨끗이 씻어 없애니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 같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네

이는 불꽃에 맑은 물 손수 끓이니

청자다완에 향기 이르나 비린내나는 차자 씻어주네

가난하게 사는 백만 백성의 삶은

봉래산 여러 신선에 물어보고 싶네

작자 이숭인의 자는 자안이며 그의 호는 도은. 성주 사람이다. 벼슬은 밀직제학·예문관제학 등을 거쳐 동지춘추관사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 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정몽주와 같이 실록을 편찬했는데 조선왕조 개국 때에 정도전의 원한을 사게 되어 정도전의 심복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문집에는 도은집이 있다. 그는 한식전의 작설차의 색과 맛과 향기를 새롭다고 읊은 시구를 시작하여 그의 시는 시인으로서의 높은 경지 뿐 아니라 다인으로서의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능히 알 수 있다.

"저 월악을 우러러보니 중원에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 동국여지승람(이숭인의 시)

공민왕(恭愍王) 때 추성좌명공신(推誠佐命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던 원구(元具)의 아들 숭인(崇仁)은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과 더불어 고려 말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목은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도은(陶隱) 숭인(崇仁)은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주요관직을 역임한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라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우왕 때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를 거쳐 서연관(書筵官)이 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경산(京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올랐다.

1392년(태조 1)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배소에서 살해당했다. 도은(陶隱)과 정도전은 목은의 동문으로 다정했던 사이였으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됨으로써 도은은 절개를 지켰고 정도전은 새 왕조에 귀부한 변질된 자가 되어 세상에 더 없는 앙숙으로 변하였다. 도은이 정몽주의 일당이라 하여 경산(京山)에 귀양갔었는데, 정도전이 그의 심복인 황거정(黃居正)을 도은이 귀양간 고을의 수령으로 보내어 매일같이 잡아다가 매질하게 하였다. 하루에도 곤장 수 백대를 때리고는 묶어서 말 위에 얹어 달리게 하여 드디어 인적이 없는 먼 곳에서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태종(太宗) 때 황거정(黃居正)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에 올랐었는데, 도은을 죽였다는 말이 임금 귀에 들어가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이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온 터이라,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구나"하고는 훈작(勳爵)을 삭제, 서인(庶人)으로 삼고 자손(子孫)은 금고(禁錮)시켰다.

압각수는 은행잎이 오리발 모양에 가깝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이 압각수는 고려 때부터 이곳(청주 중앙공원)에 있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주공이 어린 성왕을 섭정할 때,근거없는 소문으로 모함을 받아 물러나게 되자 별안간 나라 안에 큰바람이 일어 많은 벼 포기가 쓰러졌다는 고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선생 등의 충신들이 아무 죄도 없이 청주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니 갑자기 대홍수가 일어나 옥사가 유실되어 이분들은 이 나무(압각수)에 올라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청주 고을 사람들은 하늘의 감응 때문이라고 말들 하였고 왕도 이 사실을 보고 받고서 이들 충신들을 풀어 주었는데 이때 양촌 권근이 지은 글이 바로 이 압각수이다. 이 나무는 청주목 객사문 앞에 있던 수 십그루 중에서 남은 은행나무라고 한다.

첫눈

작자: 도은 이숭인

鳥失山中木 僧尋石上泉

새는 산 속의 나무를 잃고

중은 돌 위의 샘을 찾는다.

<해설>

날이 꾸물꾸물하더니 소담스레 눈이 내렸다. 길가다 만난 첫 눈에 나그네의 발길만 공연히 바쁘다. 가만 보니 바쁜 것은 나그네만이 아니다. 갑작스레 펑펑 내린 눈이 산 속새의 둥지를 덮고, 바위틈의 샘물도 지워 버렸다. 내 집이 어딜까. 샘물이 어딜 갔나. 먼 숲에서 흰 연기가 올라간다. 반갑다. 흰눈에 덮인 순결한 대지. 그 위에 첫발 자국을 찍으며 간다. 묵은 증오와 미련을 다 지우며, 소망처럼 내리는 첫눈을 본다.

(정민·한양대국문과교수)

삼은각(三隱閣)

(문화재자료 제59호 - 동학사에 위치)

고려 때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야은 길재(冶隱 吉再) 등 삼은(三隱)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 고려 유신 길재가 월영(月影)·운선(雲禪) 두 스님과 함께 단(壇)을 설치하고, 고려 태조 및 충렬왕·공민왕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다가 정몽주도 아울러 모셨다. 후에 조선 정종 1년 (1399)에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삼은의 초혼제를 지냈고, 이듬해에 공주목사 이정간(李貞幹)이 건물을 지어 삼은만 제사를 지내 삼은단(三隱壇)이라 하였다. 세조 때에 초혼각(招魂閣)을 세우고, 광해군 때 유방택을, 순조(純祖) 때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을, 그리고 후에 나계종(羅繼從)을 추가하여 6인의 제사를 지내고 있으나 이름은 그대로 삼은각이라고 한다

배열부전(裵烈婦傳)

작자: 도은 이숭인

열부(烈婦)의 성은 배씨요, 이름은 아무인데 경산(京山)사람이다. 아버지는 전의 전사(戰士)인 중선(中善)이다. 15세가 지나서 사족(士族)인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가정의 일을 잘 돌보았다.

- 열부 배씨의 신분(도입)

경신(庚申)년 가을 7월에, 왜적이 경산에 다가와서 온 고을에 분탕질을 하는데도 감히 막아 내는 자가 없었다. 이 때에 동교는 합포(合浦)에 있는 원수(元帥)의 막(幕)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적은 열부가 사는 마을에 들어왔다. 열부가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나니 적은 그를 쫓아 강에 이르렀다. 강물이 한창 불어 오르는 판이어서 열부는 화를 면하지 못할 줄을 짐작하고 젖먹이 아이를 강둑에 놓아두고 강으로 뛰어 들어갔다. 적은 활에 화살을 메우고 잔뜩 당기어 그를 겨누면서 말하기를 " 네가 돌아오면 너의 죽음은 면할 것이다." 하였다. 열부는 적을 돌아보며 꾸짖기를 " 어찌하여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내가 어찌 너에게 더럽힘을 당할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 하였다.

- 왜구의 노략질과 열부 배씨의 위기(위기)

적은 어깨를 겨냥하고 화살을 두 번 맞히니, 열부는 마침내 강물 속에 빠져 죽었다.

-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킴(결말)

(교과서에서 생략된 부분)

적이 물러간 뒤에 집안 사람이 그의 시체를 찾아서 장사를 치렀다. 체복사 조공 준이 그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여 그 동리에 정표하였다. 도은자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보통 신하가 되어서는 신하의 도리를 극진히 하며, 아들이 되어서는 아들의 도리를 극진히 하며, 아내가 되어서는 아내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려운 큰 일을 당해서는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배씨는 일개의 부인으로서 죽음을 보기를 당연히 돌아갈 곳처럼 생각하였고, 적을 꾸짖은 말은 비록 옛날의 충신열사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일찍이 남쪽 지방을 다니다가 소야강을 지났는데, 이 곳이 곧 열부가 절조를 위하여 죽은 곳이다. 여울물은 슬피 흐느끼고 숲의 나무는 쓸쓸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끝이 쭈빗하게 하였다. 아, 장렬하여라."

(요점 정리)

연대 : 고려 공민왕 때

작자 : 이숭인

종류 : 설화

형태 : 전기체, 사전체

구성 : 3단 구성

표현 : 번역

주제 : 배열부의 정절 찬양

의의 : 유교적 도덕관인 '열'을 통하여 열부의 귀감으로 삼았음.

내용 : 사족(士族)인 이 동교(李東郊)의 부인 배씨(裵氏)가 왜적이 침입하여 욕보이려 할 때 죽음으로써 정절(貞節)을 지킨 행적(行績)을 기록한 전기다.

출전 : 동문선 (東文選) 권 100

(내용연구)

열부(烈婦) : 열녀(烈女), 절개를 지킨 부인

경산(京山) : 지명. 남쪽의 한 지방이나 현재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 않음.

진사(進士) : 문벌이 높은 집안, 또 그 자손. 선비나 무인의 집안, 또 그 자손

출가 : 여자가 시집을 감.

분탕(焚蕩)질 : 재물을 모조리 빼앗아 감. 노략(擄掠)질 하는 것.

합포(合浦) : 마산(馬山)의 옛 이름

원수(元帥) : 장수의 으뜸. 전시에 군(軍)을 통솔하는 장수

막(幕) : 으뜸되는 장수 밑에서 그를 돕는 장교, 곧 막료(幕僚), 막빈(幕賓), 막하(幕下), 막 객(幕客)을 뜻함. 군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보아 막사(幕舍)의 뜻으로 볼 수도 있음. 장군이 군무(軍務)를 보는 군막(軍幕). 중국에서 옛날에 장군을 상치(常置) 하지 아니하고 유사시에는 특별히 임명되었다가 일이 끝나면 해직하였으므로 청 사가 없이 장막을 쳐서 집무소로 사용하였던 데서 유래함.

불어 : 물이 늘어. 붇+어>불어('ㄷ'불규칙 활용)

판이어서 :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려는 상황이어서. '판'은 '일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뜻하 는 말이다.

겨냥하고 : 과녁을 겨누고

열부의 성은 - 이름은 아무인데 경산 사람이다 : 고대 서사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 투적인 형식으로 글의 서두에 주인공의 신분을 요약 제시하였다. 사족과의 결혼에 의한 배씨의 신분과 근면한 성품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옛날 여 성들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아무라고 표현했다.

내가 어찌 너에게 더럽힘을 당할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겠다는 여 인의 절개로, 정절을 중요시했던 유교적 가치관을 말한다.

(이해와 감상)

글의 내용은 왜적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한 열부의 행적을 찬양한 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글은 국가에서 정문을 내렸다는 기록과 작자의 평을 제외한 부분이다. 절개는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절대적이었다. 이 작품은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윤리관을 이상적인 여인에 대한 동경에서 나타난 것이다. 자식을 떼어놓고서라도 죽음으로써 정절(貞節)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하여 상층 계급의 사대부(士大夫)가 전기를 쓴다는 자체에서, 이미 이 작품의 사상적 바탕과 가치관을 쉽게 추측해 낼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을 왜적의 침입에 저항하는 한 여인의 애국적 태도에 접맥시킴으로써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또, 이러한 전기는 후대에 발생하는 고대 소설에 영향을 주어 많은 전기류(傳記類)의 소설을 출현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국문학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참고적으로 이 글은 실제 있었던 인물의 전기라는 점에서 앞에서 본 가전(家傳)과는 구분되는 사전(史傳)에 속한다. 이는 가전보다 오래 된 형식으로 그 근원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열전(史記列傳)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의 열전이 사전체(史傳體) 형식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밖에 상층 문인들에게 의하여 많은 사전이 씌어져 20여 편이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심화 자료)

전기류(傳記類)의 분류

사전(史傳) : 인물의 일대기의 정체(正體)와 사건 중심기인 변체(變體)가 있다. 삼국사기 열 전, 배열부전 등.

가전(家傳) : 가계(家系)에 대한 전기. 그 형식은 사전(史傳)의 정체와 같다.

탁전(託傳) : 형식상 제3자에 대한 전기이지만 실제로는 작자 자신의 자서전, 백운거사전(白 雲居士傳)등.

가전(假傳) : 의인화된 사물에 가탁한 전기. 공방전(孔方傳)·국선생전(麴先生傳) 등.

기타 소전(小傳)·별전(別傳)·외전(外傳)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한문학

고려시대 한문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산문(散文)보다 운문(韻文)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의 양 대가(大家)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수많은 작가의 군상이 오로지 한문·당시(唐詩)로써 종풍(宗風)을 삼았으니 이는 당시 중국에서도 이러한 기풍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려의 문학이 한(漢)·당(唐) 나라의 경향만을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고려 1대(代)의 거국적 사업이었던 대장경(大藏經)의 간행은 순전히 자주적 사업이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제도가 확립되었고, 예종(睿宗) 때는 국학에 칠재(七齋)를 설치하였으나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사학(私學)의 권위가 국학을 능가하게 되어 거유(巨儒) 최충(崔?이 설치한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비롯하여 실로 12개의 도(徒)가 있어 이후 고려의 명사들은 거의가 이 12도의 출신이었다. 신라 때 주조를 이루던 향가는 점차 쇠퇴하여 일종의 사뇌화(詞腦化)하였고 작품도 균여(均如)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首)와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을 뿐이다. 반면 한국의 악부(樂府)가 이 시대에 이루어졌으니 고려의 악부는 속악·당악·아악(雅樂)의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속악은 《한림별곡》을 위시하여 31편에 이르며, 당악은 속악과 잡용(雜用)하였는데 《헌천도(獻天桃)》 이하 48편이 있다. 아악은 종묘의 악으로 예종 때 지은 《등가악장(登歌樂章)》이 전한다.

〈시가〉 시가(詩歌)는 초기의 작가로 박인량(朴寅亮)·김황원(金黃元)·정지상(鄭知常) 등을 들 수 있으며, 최충도 훌륭한 시인이었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도 뛰어난 시인이었다. 박인량의 《금산사(金山寺)》, 정지상의 《송우인(送友人)》, 김황원의 《부벽루송(浮碧樓頌)》은 당대의 걸작이었다. 고려 후기의 시가는 이규보(李奎報)·오세재(吳世才)를 포함한 죽립칠현계(竹林七賢系)와 성리학(性埋學)이 대두한 이후의 이제현·이숭인(李崇仁) 등의 양대 주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 등도 운문에 정통한 시재(詩才)들이었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서사시의 백미라 할 수 있으며, 그 후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도 이름이 높다. 이제현의 《산중설야(山中雪夜)》, 이색의 《부벽루(浮碧樓)》가 있고, 정몽주의 시도 일가를 이루어 《단심가(丹心歌)》는 한글 시조(時調)로도 번역되었고, 이숭인은 일찍이 《오호도(嗚呼島)》로 이름이 높았다.

〈사·부〉 고려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辭)·부(賦)도 한문학상 간과할 수 없으니 이인로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한국의 한문학사상 처음 나타난 사이다. 그 후 이색은 《유수사(流水辭)》를 비롯한 여러 편의 사를 지었고, 정몽주의 《사미인사(思美人辭)》도 호방준결(豪放峻潔)하며, 이숭인의 《애추석사(哀秋夕辭)》는 방형비측(芳馨菲惻)한 기품을 풍긴다. 부는 일종의 유운적(有韻的)인 산문으로, 김부식의 《아계부(啞鷄賦)》를 그 시초로 본다. 이규보는 《외부(畏賦)》를 비롯한 6편의 거작을 남겼고, 이인로의 《옥당부(玉堂賦)》와 《홍도정부(紅桃井賦)》는 쌍벽을 이룬다.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 이색의 《관어대부(觀魚臺賦)》도 유명하다. 고려 후기의 산문문학은 운문처럼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나 전기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잡록(雜錄)과 선집(選集)으로 구분할 수 있으니, 잡록계로는 이인로의 명저 《파한집(破閑集)》과 《쌍명재집(雙明齋集)》을 첫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은 문학사상 처음으로 ‘소설’이란 글자를 사용하였다.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은 《파한집》의 보편이라 할 수 있으며, 승려 일연(一然)의 역저(力著)인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 일대를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잡록계의 명저이고, 또한 이제현의 《역옹패설(翁稗說)》도 빼놓을 수 없다. 선집계(選集系)의 저서로는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 김구(金坵)·이송진(李松瑨) 등과 수창(酬唱)한 《용루집(龍樓集)》을 첫째로 들지 않을 수 없다. 김태현(金台鉉)이 찬한 《동국문감(東國文鑑)》과 김경숙(金敬叔)의 《선수집(選粹集)》 등은 모두 당시 선집계의 명저이다. 이 밖에 고려 후기의 한문학으로서 가전체(假傳體)의 소설이 있다. 임춘(林椿)의 명작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었으며, 이규보의 《국선생전(鞠先生傳)》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은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다. 그 밖에 이곡(李穀)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승려 식영암(息影庵)의 《정시자전(丁侍者傳)》 등은 모두 가전체의 명작이다.

寄陶隱(도은에게 부치다)

작자: 둔촌 이집

子安年甚小還似老成翁高義追前輩新詩繼國風三年江海謫一日道途通努力扶王室從今愼厥終

자안(子安)은 나이 아주 젊지만 오히려 노성(老成)한 어른 같도다.

고의(高義)는 선배를 바짝 따르고 신시(新詩)는 국풍1)을 이었다네.

강해(江海)에서 삼 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하루는 갑자기 길이 트였지.

힘을 다하여 왕실을 부호(扶護)하며 지금부턴 조심조심 영종(令終)을 이루게나.

註 1) 국풍(國風): 시경(詩經)의 시체(詩體)의 하나. 각 국의 풍속 인정을 읊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 사물(事物)의 도리 또는 이치(理致)

* 도은(陶隱) : 이숭인(李崇仁:1349-1392)의 호다. 자는 자안(子安)으로 본관은 성주(星州)다.

1362년(공민왕 11)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성균관 개창(改創)에는 정몽주(鄭夢 周), 김구용(金九容) 등과 함께 학관(學官)으로 있으면서 조제(條制)를 정하 였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당하고 명나라의 사신이 피살(被殺)되는 등 불상 사가 일어난 것을 해결하고 세공(歲貢)도 감면(減免)받게 하였다. 명나라와 친할 것을 주청(奏請)하다가 귀양가고 1376년에는 정몽주와 함께 실록(實 錄)을 편수했다. 1386년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갔을 때에는 황제(皇 帝)가 공의 재주를 인정해서 관복(官服)과 벼루 금장(金杖) 등을 하사하였 고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도 관복을 착용하는 풍속(風俗)을 바로잡았다.

1390년 옥사(獄事)에서 풀려나와 벼슬이 지밀직사(知密直事). 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정몽주 선생이 살해된 뒤에 그 일당이라 하여 귀양갔다가 음계(陰計)에 의하여 배소(配所)에서 살해되었다. 고려말 성리 학의 대유(大儒)로서 시문(詩文)과 외교문서에 밝아 명나라에도 유명했으 며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 다. 성주(星州)의 충현사(忠賢詞)와 안산서원(安山書院), 개성(開城) 표절사 (表節詞) 등에 제향(祭享) 되었다.

遁村先生遺稿序(둔촌선생유고 서)

昔予始見遁村先生于圃隱先生之小軒新脫逆旽之禍來自南方其貌莊而毅其氣充然而秀奇語琅然而確以暢予心奇之再見于牧隱先生之草廠先生敬相待移日予聞其餘論繼而陶隱邀牧隱圃隱遁村設小酌置盆梅于前作梅花聯句予亦往參席末聞其警句後子移家硯井洞去遁村龍首山下之草亭不數里贈予菊花詩一篇子謹和之因幸遂相從之願未幾遁村病而卒厥後十餘年間圃隱陶隱相繼淪沒而牧隱先生亦且乘化矣獨子尙在至今每念相從之樂況然如夢中事鳴呼可勝悲哉三隱詩文皆行于世而遁村獨無之子竊怪焉今其子刑曺參議之直奉其遺稿來示子曰吾先子欲施所學而官不克達欲行所志而壽不克永不肖孤所以有終天之慟也嘗聞立揚顯親孝之終也不肖孤安敢必哉切欲刊此數百篇以傳諸後使後之尙論之士知吾先子之名請子幸 其券端子聞而益悲之讀其詩竟日所謂充然而秀琅然而確以暢者悉著于聲律之間古人云詩不可以僞爲豈虛語哉遁村有三子俱登科以文行著名參議其長也拳拳以顯父美傳父名爲念其志亦可尙已永樂八年庚寅七月日晉陽浩亭河崙謹序

지난날 나는 둔촌선생을 포은선생(圃隱先生)의 소헌(小軒)에서 처음으로 뵈었는데 선생이 막 역적 신돈(辛旽)의 화(禍)에서 벗어나 남방(南方:영천)에서 올라오신 무렵이었다. 선생의 용모(容貌)는 장중(莊重)하고 강의(剛毅)해 보였으며 기품(氣稟)은 꽉 짜이면서 준수하였고 음성(音聲)은 옥이 구르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流暢)하여 나는 내심 몹시 기이(奇異)하게 느꼈었다.

두 번째는 목은선생(牧隱先生)의 초창(草廠:초막)에서 뵈었는데 목은선생께서는 경의(敬意)를 갖고 대하면서 다음날까지 함께 지내시기에 나는 곁에서 그 여론(輿論)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에 곧 도은(陶隱)께서 목은, 포은, 둔촌을 초대하여 간략한 술자리를 마련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분매(盆梅)를 앞에 놓고 매화(梅花)를 주제로 연구(聯句:한 사람이 한구씩 불러서 한 수를 이룬 시)를 지었는데 나도 말석(末席)에 참여하여 그 분들의 경구(驚句:才氣警發한 글귀, 즉 경인구<驚人句>)를 들었다. 뒷날 나는 연정동(硯井洞)으로 이사했는데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둔촌의 초정(草亭)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선생께서 나에게 국화시(菊花詩) 한 수를 지어 주시기에 나도 삼가 화답을 했는데 이로 인하여 다행히도 상종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얼마 후에 둔촌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뜨셨고 그 뒤 십여 년 동안에 포은과 도은도 연이어 세상을 떠났으며 목은선생 마저 이승을 하직하고 홀로 나만이 아직껏 남아있다. 이제 와서 매양 지난날 상종하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어렴풋이 꿈속의 일만 같이 느껴진다. 아! 이 슬픔을 어찌할거나!

삼은(三隱:목은, 포은, 도은)의 시문(詩文)은 모두 세상에 행해지고 있는데 둔촌의 시문만이 그렇지 못하여 몹시 안타까워하였더니 이제 선생의 아들 형조참의(刑曹參議) 지직(之直)이 선생의 유고를 안고 와서 내게 보이며 말하기를

겁나의 선인(先人)께서는 배우신 바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벼슬이 높지 못하였고 뜻하신 바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수한(壽限)이 길지도 못하였습니다. 불초 고(不肖 孤)는 그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없을 슬픔을 안고 있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 도리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는 불초한 이 사람이 어찌 감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나 하겠습니까? 다만 남기신 이 몇 백편의 글을 간행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뒤에 오는 상론지사(尙論之士)로 하여금 선인의 이름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오니 바라건대 선생께서 이 책머리에 서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슬퍼했으며 하루종일 그 시를 읽어보았는데 앞서 말한 그대로 꽉 짜이면서 준수하고 옥을 굴리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스러움이 모두 그 성률(聲律:시부<詩賦> 속에 나타나 있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겁시란 거짓으로 지을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허언(虛言)이겠는가?

둔촌께서는 세 아들을 두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참의(參議)는 그 장자(長子)로 정성을 다하여 그 아버지의 미덕(美德)을 드러내고 이름을 전해드리기에 전념(專念)하니 그 뜻 또한 높이 살 만하다 하겠다.

영락(永樂: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8년 (조선조 태종<太宗> 10, <서기 1410>) 경인(庚寅) 7월에 진양(晉陽) 호정(浩亭) 하륜(河崙)은 삼가 서하다.

註) 하륜(河崙: 1347-1416):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1365년(공민왕 14) 문과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재임시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미움을 사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좋은 치적(治積)을 쌓고 고공좌랑(考功佐郞) 등 여러 벼슬을 거쳐서 첨서밀직사(簽書密直事)가 되었으며 조선조 개국 후에는 좌우 정승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태조실록의 편찬을 지휘하였다. 좌명공신(佐命功臣) 일등(一等)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계룡산(鷄龍山) 천도를 반대하고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었으며 태조 5년에 가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성공하고 돌아왔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천문지리(天文地理)에도 정통했다. 시호(諡號)는 문충이다.

이집(李集){1}

1314(충숙왕 1)∼1387(우왕 13).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당(唐)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비슬산 용천사 불전을 찬영하며

작자: 도은 이숭인

俗客驅東道 속객이 말을 몰아 동쪽 길로 가니

高僧臥小亭 노승이 조그만 정자에 누워 있더라

雲從朝暮白 구름은 해를 좇아 온종일 흰데

山自古今靑 산은 옛과 다름없이 언제나 푸르구나

往事追松子 솔방울 벗삼은 지난 일 한적했고

羈逝愧地靈 말몰아 유람가니 地靈뵐낫 없어라

愍勒汲澗水 바램이 있다면 산골 물길어다가

一 煮蔘  한웅큼 잡은 蔘  달여나 볼까.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비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용천사는 의상스님께서 670년(신라 문무왕 10년)에 창건하여 절의 이름을 처음에는 옥천사라 하였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해동 화엄종의 宗風을 떨치던 대가람으로 상주하던 스님만 천여명이었으며 큰절에 딸린 부속암자만도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에도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1267년(고려 원종 8년) 삼국유사를 지으신 일연스님이 중창하여 불일사라 하였고 다시 (고려 원종 10년) 경주로 행차한 임금이 일연스님께 기우제를 청하고 친히 용천사란 현판을 내렸는데 이로부터 용천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陶隱先生詩集

李崇仁(高麗)著, 卞季良(朝鮮)編.

5卷 1冊(102張) 木板本 32×22.5cm.

四周單邊 半郭:21.5×17.5cm.

有界 12行 22字 注雙行.

版心:上下花紋魚尾.

李崇仁(1347∼1392)의 詩文集으로 간년 미상이다. 李崇仁의 字는 子安, 號는 陶隱, 京山府人. 高麗 恭愍王朝에 登第하여 肅雍府丞을 거쳐 長興庫使로 올라 進德博士를 겸 했다. 王禑때 典理총郞을 除受하였는데, 金九容, 鄭道傳 등과 實錄을 撰修하였다. 한때 事大文書를 撰하였으며, 文名이 中原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麗末 혼란한 政局에 휩쓸려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北元使 배척이 화근이 되어 유배된 후 잠시 復職되었었으나, 鄭夢周의 黨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고 영남으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의 그의 최후는 특히 비참하여, 李穡의 문하에서 함께 師事한 鄭道傳이 그와함께 處世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심복을 流配所의 長으로 보내어 杖殺시켰다. 本集의 序文에 의하면 그의 생존시에 觀光集, 奉使錄, 陶隱齋吟蒿 등을 自撰하였다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本集은 麗朝에 李崇仁의 주관하에 登第한 李芳遠이 太宗으로 즉의한 후 御命으로 처음 編刊시킨 것이다. 1406년(太宗 6) 卞季良이 編次한 것으로, 앞머리에 明 周卓의 서문과 鄭道傳·權近이 쓴 서문이 있고 3권의 詩集, 2권의 文集에 이어 李穡, 張溥, 李士敏이 쓴 跋文이 첨부되어 있다. 그 후 여러차례 重刊되었는데 이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수록된 作品을 卷別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1}:辭 1수(哀秋夕辭), 詩 27수(感興, 漢江謠 등), {권2}:詩 414수(扈從城南, 憶三峯隱者 등). {권3}:詩 511수(正朝宮門帖字, 李浩然借拙藁以詩答之, 寄圃隱등), {권4}:記 6편(複齋記등), 誌 1편(診脈圖誌), 序 11편(送李浩然赴合浦幕序, 送息菴遊方序, 送日本釋有天祐上人還國序, 太古語錄序 등), {권5}:傳 2편(草屋子傳, 裵烈婦傳), 題後 3편(題明極卷後, 題干峯詩藁後 등), 議 1편(大夫士廟祭議), 先大夫人行狀 1편, 讚 1편(鄕僧止菴寫余陋眞因作讚), 字說 1편(忠原判官李君及字說), 전 4편(賀冬至전 등), 表 16편(八關表, 賀郊祀改元表, 請承襲表, 請冠服表, 陳懷表 등), 箋 1편(進重刊陳澔集說禮記箋). 그의 詩는 당시 문단의 領袖였던 李穡에 의해 31세 때에 이미 극구 찬양되어진 바 있고, 權近도 서문에서 그를 屈原, 陶淵明 등에 비기면서 麗朝의 大家로 손꼽았다.

本集의 {권1}에는 古體詩가, {권2,3}에는 絶句 律詩가 수록돼 있는데, 古體詩나 律· 絶 모두 그의 솜씨를 잘 드러내고 있다. 古體詩는 모두 格調가 잘 다듬어져 있을 뿐 아니라, 氣慨와 感懷 그리고 그에 따른 感興이 그 格調를 타고 흘러나와 독자의 흥취를 자아낸다. 또한 律·絶은 형식이 그의 詩想에 봉사하는 地境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며 用語에 무리가 없고 感興이 妙致있게 도출되고 있으며, 평소의 감회가 慷慨와 諦念을 섞어가며 그려져 있다. 한편, 그의 文은 窮僻한 어휘나 生硬하고 난삽한 용어가 없고 文辭가 雅馴하며 節奏가 있다. 明 太祖도 陶隱이 지은 表文을 보고 表 辭의 誠切함을 칭찬하였다 한다. 마찬가지로 記·序 등도 順通한 문체로 뜻한 바를 表明하기에 힘썼으며 衒學的인 과시가 없어 숙달된 문체를 보여준다.

嗚呼島(오호도)

작자: 도은 이숭인

嗚呼島在東溟中 滄波香然一點碧

夫何使我雙涕零  爲哀此田橫客

田橫氣槪橫素秋 義士歸心實五百

咸陽降準眞天人 手注天潢洗秦虐

橫何爲哉不歸來 怨血自汚蓮花鍔

客 聞之爭奏何 飛鳥依依無處托

寧從地下共追隨 軀命如絲安足惜

同將一刎寄孤嶼 山哀浦思日色簿

嗚呼千秋與万古 此心 結誰能知

不爲轟霆有所洩 定作長虹射天赤

君不見古今多少輕薄兒 朝爲同胞暮仇敵

오호도는 동쪽바다 가운데 있는데

물결이 아득하여 푸른 점이 되었네.

나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다만 슬피 이 전횡을 위함이니.

전횡의 기개는 가을을 가득 채웠고

의사의 마음 오백이 한데 모였다네.

함양의 높은 콧대는 진실로 하늘 사람의 일이었고

은하수 물을 끌어내 진나라의 가혹함을 씻었다.

횡이시여 어찌 다시 오지 못하시오

원통한 피만 연화검에 응겨 남았네.

객이 그 말을 들었으나 이미 늦었고

날으는 새조차 의탁하여 갈 곳이 없네.

차라리 죽어가서 같이 따를까

실낱같은 목숨 무엇이 아까우리.

한번 칼을 물어 외로운 섬에 의탁하니

산천이 슬퍼하고 일색 또한 빛을 잃었네.

아아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난들

이 마음 맺혔음 그 누가 알까.

천둥소리 없어도 비는 내리고

긴 무지개되어 하늘 붉혔네.

당신은 고금의 많은 경박자를 보지 못하였는가

아침엔 동포 저녁에는 원수가 되네.

嗚呼島(오호도) - 칠언고시

①작가 : 이숭인은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고려 말의 三隱(삼은)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②이 시는 '오호도'에 얽힌 전횡의 고사를 소재로 하여 지은 작품으로 표현이 매우 격렬하고 강개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분을 절로 느끼게 한다.

③'오호도'에 관련된 소재로 하여 지은 작품에 이숭인과 정도전의 작품이 있다.

④夫何(부하) : 무엇이 어찌하여, 夫는 말을 시작할 때 쓰는 것으로 대개 '무릇'의 뜻

⑤安足(안족) : 어찌 족히....하리오, 安은 의문의 뜻을 나타내는 '어찌'의 뜻

이 시는 40세에 賀正使(하정사,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신)로 명나라에 갔을 때 지은 도은의 대표적인 시이다. 전횡은 제왕 전영의 아우로 한나라 초기 제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호도로 쫓겨갔다. 한이 신복하기를 강요하자 거부하고 자결하였고, 500여명의 식객들도 전횡의 뒤를 따라 오호도에서 자문(목을 베어서 죽음)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도은은 哀秋夕辭(애추석사)에 나타난 강직한 정신을 바탕으로 절의를 지키며 죽은 전횡과 식객을 조상하면서 상황에따라 아침에 동지였다가 저녁에 원수가 되는 고금의 경박아들을 비판하고 그들이 보인 절의를 부각시키며 자심의 의지를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哀秋夕辭(애추석사)

작자: 도은 이숭인

忠君與愛國兮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함이여

志專專其靡他 뜻은 오직 한 마음 딴마음 없도다

何時俗之險 兮 어쩌자고 세상은 험악해만 가고

學曲而心阿 학문은 비뚤어만 가고 마음은 아부만 하는가

彼讒諛之得志兮 너희 아첨하는 무리들이 뜻을 얻음이여

自昔凶人國也 옛 부터 나라에 해를 끼쳤거니

 萬死余無悔兮 비록 일만번 죽더라도 내 후회치 않으리니

恐此志不白也 이 마음 변할까 두려워하네

竊不敢改余之初心兮 내 가만 생각해 봄에 처음 뜻 고치지 못함이여

固長終乎窮  참으로 궁색한 수렁에서 마치리

前余生之千古兮 전생의 천고여

其在後者無窮 내 후생도 무궁하리

失余志之不廻兮 화살 같은 내 뜻을 쏘아 돌이키지 못함이여

仰前修而飭躬 옛 사람의 닦음을 우러러 이 몸을 닦으리

世貿貿莫我知兮 세상이 두려워 나를 몰라줌이여

庶憑辭以自通 노래나 읊어 스스로 위로하리

애추석사는 여러면에서 屈原(굴원)의 「漁夫辭(어부사)」와 「離騷經(이소경)」을 연상케 하는 글로 도은은 혼란한 사회속에서 참소를 입어 귀양길에 오르면서 가상의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결코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결연한 의지를 말하고 있다. 당시 부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고에 걸려 유배를 떠나면서 지은 자전적인 고백의 글로 오직 충군·애국하는 한마음으로 살아 왔는데 아첨하는 무리들에 의해 유배길에 오른 것이다. 일만번 죽더라도 내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는 궁색한 가운데 생을 마칠 각오를 하면서 '옛 사람의 닦음을 우러른다'고 했는데 이는 필경 굴원을 따르고자 하는 것으로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생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성리학적인 대의명분과 충군·애국하는 정신, 강직한 성품이 역성혁명을 추구하는 세력들과는 또 다른 길을 걷게 했을 것으로 짐작케 한다.

□굴원(屈原/BC 343 ~BC 277)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비극 시인.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 이름 평(平). 원 자.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졌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사기》에 적혀 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으나, 연형파(連衡派)인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출병(出兵)하여서도 고전할 따름이었다.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에 따라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마저 석방하였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